2010/09/01 00:19

외로운 고학번 + 3학년 언니 Sunjuselves

그저께 드디어 '외로운 고학번'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고학번은 외롭다. 고학번은 심심하다. 고학번은 그냥 중앙도서관이 제일 편하다. 고학번은 수업시간에 맨 앞 혹은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는다.
는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안되었었다. 그저께 어제 드디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전까지는 '왜 3학년 이상 선배들은 과방에 들어오길 꺼리지? 동방에 잘 안오지? 자꾸 자기가 고학번이라고 말하는거지?'
잘 몰랐다. 그리고 내가 1학년 때 선배들이 자꾸 우리를 신입생이라고 신기해하고 그러는 게 이해가 안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알았다.

 
내가 그 느낌을 깨닫게 된 것은 이번학기 휴학을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고 나의 다음학기를 상상하면서부터이다.

지금 친구들이 다 교환학생가고, 공부하려고 휴학을 하고, 군대를 깄다.
(물론 안 그런 친구들도 있지만 떠난 친구들이 많아서 그냥 떠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장에 수업을 같이 들을 사람이 없고, 공강 때 놀 사람이 없고, 점심을 먹을 사람이 없다ㅠㅠㅠ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은 이제 거의 이번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한다. 그러니까 이제 나랑 학교에서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없다.

사실은 나도 이번에 휴학을 하니까 떠나는 입장이라서 할 말은 없긴한데, 아 뭔가 기분 이상하다.
이번학기에 내가 만약에 학교를 다녔으면 엄청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 너무 충격받아서 선배들한테 물어봤다.
"혹시 선배도 고학번 되면서 외롭다는 생각해봤어요?"

거의 10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도 이제 느끼냐"
이 반응이었다.

맙소사. 나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안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심지어는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선배들도 그랬다고 해서 너무 신기했다.
옛날에는 고학번고학번 하면 왜 자꾸 저러나 했는데, 이제 왜 자꾸 고학번고학번했는지 감정적으로 이해가 갔다.

난 사실 혼자 학교에서 밥 먹는거 별로 안 좋아해서 며칠전까지는 한번도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근데 애들이 하도 뭐라고 그래서 며칠 전에 혼자 한번 먹어봤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한테 '어른이 되어간다'고 그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대박.

내가 하필 왜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생각을 해봤다.

1학년, 2학년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개념도 없고.
1학년 때는 그 어렵다는 입시를 뚫고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마냥 좋아서 내가 다 어른인 줄 알고 행동하고, 2학년 때는 후배도 들어왔겠다 1년동안 노는 법도 배웠겠다 그냥 이것저것 어설프게 하다보니 1년이 또 갔다. 그래서 그냥 좋은 친구들 만나서 좋게 좋게 잘 지냈다.
그런데 이제 3학년이 되니까 뭔가 지난 2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엄청나게 깨닫게되는 것이 많았다. 이제 어느 정도 내 주관도 생기고, 이전보다 약간의 개념도 더 생긴 셈인데, 그걸 바탕으로 내가 20, 21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니까 부끄럽기 짝이없다 정말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그렇게 놀고나니 나는 고학번이 되어있었다.
(작년까지만해도 내가 나 고학번이라고 하면 선배들이 '니가 무슨 고학번이야! '했는데, 이제는 '응, 너 고학번이야' 한다.)

지난 2년동안 그렇게 가치관의 혼란 아닌 혼란을 겪고 이제 고학번이 되어서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려고 하니까,
그 '안정'의 방식은 그동안 서로의 가치관에 따라서 달라져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에 맞는 길을 각각 가고 있었다.
각자의 가치관 따라 가다보니 그 길이 서로 달라지는 상황은 필연적이었다.
지난 시간동안 경험한 것, 느낀 것, 대응하는 자세가 서로 다르니까.
그러나 나는 내 방식을 강요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가는 길에 다른 사람도 있으면 외롭지 않을테지만,
강요해도 안 바뀐다는 것과 강요로 그 길을 바꾸어도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데에서 이런 외로움이 나오지 않나 싶다.
사실은 대부분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겠지만.

사실 이건 단순히 고학번 문제가 아니라 사람문제이고, 분위기 문제일텐데 너무 일반화했나싶기도하지만
내가 원래 감정의 일반화에 수긍하는 경험이 잘 없는데, 이번에 너무 갑자기 확 느껴서ㅋㅋㅋㅋㅋ

어쨌든 나는 원래 외로운 감정이 뭔지 잘 몰랐는데
'고학번'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이제 좀 알 것 같다.

박선주님이 외로움의 감정을 45% 획득하셨습니다.

덧)
저학번님께 -이건 '너네는 고학번이 아니라서 몰라'가 아니라 '고학번이 되니까 이렇더라'라는 이야기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기님께 -학교를 잠깐이나마 떠나는 사람도 이런데, 다니시는 분들 오죽하십니까ㅜㅜ 힘내십쇼
나보다 고학번님께 -이걸 어떻게 견디셨나요ㅋㅋㅋ 대단하십니다. 선배들이 다르게 보인다는ㅋㅋ


덧) 김연수 소설을 읽는 중이다.

덧) 우리 이번에 하는 연극에서 '등산가'의 말을 좀 바꿔본다면

'천사양반, 고학번이 느꼈을 그 막막함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소?'

덧) 3학년 언니

내가 1학년 때 느낀건데, 3학년 언니들은 정말 그 3학년 만의 아우라 이런게 있었다. 뭔가 어떤 옷을 입어도 딱 안정된 느낌이고,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엄청난 포스가ㅋㅋㅋㅋㅋㅋ아직도 기억나는게 미녜랑 점심먹으러 가면서 앞에 소연언니랑 기영언니가 지나갔는데, 둘이 너무 예뻐서 우리가 "우리도 2년 뒤엔 저러겠지?" 했었다. 

그리고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연극반 뒷풀이에서 이야기하다가 3학년 언니들은 3학년 언니만의 포스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내가 1학년 때 3학년 언니들한테서 느꼈던 건 나만 느끼는 건줄 알았는데,
3학년을 여러번 봐왔던 선배들이 항상 그렇다고 해서 진짜 신기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3학년언니였다.


덧글

  • 바쁜남자 2010/09/01 09:33 # 삭제

    드디어 밥 혼자먹었구만 ㅋㅋㅋ

    welcome to 초고학번 월드다

    - 행정상 드디어 4학년 선배-
  • 박선주 2010/09/02 01:59 #

    에이 아직 나 초고학번은 아니다 선배님ㅋㅋㅋㅋㅋㅋ